일상노트 : 2007/12/30 20:11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변천 과정
청화백자란 정선된 백토로 기물을 만들고 그 위에 산화코발트가 주성분인 안료를 사용하여 문양을 그린 뒤 순백의 유약을 입혀 1,250℃ 이상 되는 고온에서 환원 번조한 백자의 일종 으로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백자의 종류 중 하나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 안료는 회청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 또는 청화백자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 또는 청화사기라고도 불렀다.
중국의 청화자기
중국에서는 청화백자 이전에 청화자기(靑華瓷器), 고청화(古靑華)이며, 청화백사기(靑華白沙器) 등으로도 불렸다.
청화자기의 제작은 원대(元) 중, 후기에 성숙되었으며, '청화'라는 단어는 명대초기에 비로소 출현하였다. 경덕진 (景德鎭) 가마에서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로 수출되고, 명나라(明)에는 매우 우수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으며 이후 청대 까지도 백자의 주류를 이루었다.
한국에 전래된 것은 14세기 말이며, 본격적으로 생산된 것은 15세기 중엽 이후이다.
조선시대의 백자
우리나라에서 언제 처음으로 백자가 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청자가 제작되는 시기와 거의 때를 같이 하고 있거나 약간 늦은 때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11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전반까지 약 200년의 기간동안 음각, 양각, 혹은 민무늬 백자가 생산되었으나, 이 같은 고려의 백자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말까지 청자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고, 꾸준히 제작된 반면 백자의 생산은 거의 중단되었었으며, 조선백자와 연결될만한 뚜렷한 근거도 없다고 볼 수 있다.
1392년 조선왕조가 등장하였으며, 이는 단순히 왕조의 교체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의 근거를 이루는 중심사상의 총체적 변화를 가져 왔다. 고려시대를 풍미하던 불교는 말기에 가까워지면서 여러 가지 폐단을 드러내었고 그 자리에 유교가 정치적, 제도적, 문화적, 사상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불교문화를 대표하던 고려청자가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었고, 유교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새로운 기명(器皿)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백자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기명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청화백자
중국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 10년)에 명나라에서 보내온 것이 처음이다. 한국에서 청화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년) 중국에서 회청(回靑)이 수입된 뒤부터이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5년(세조 11)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69년에는 전남 강진산 토청(土靑: 국내에서 생산된 청화안료)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 그 후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 청화백자는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번조되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듭 변천하였다.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변천과정
15, 16세기의 청화백자는 안료를 얻기가 어려운 때이므로 안료를 아껴 쓴 흔적과 사용하는 데 서툰 점을 볼 수 있으며, 그릇의 형태는 항아리의 경우 어깨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병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굽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이후 17,18세기의 청화백자는 넓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와 전체의 모양이 구형에 가까워져 양감이 있으며, 목이 길어지고 표면에 모를 낸 각 병의 형식이 나타난다.
무늬에 있어서도 표면에 공간을 많이 남기던 초기에 비하여 굵은 필선)으로 표면 전체를 충분히 활용하였으며 화재도 추초무늬와 같은 15,16세기의 가냘픈 무늬에서 용, 소상팔경, 십장생 등을 그렸다.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백자의 최후를 상징하듯이 표면이 거칠고, 유조는 회색이 많았으며, 목이 높고 몸이 길어 불안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화의 안료는 서양에서 양청이라는 안료가 수입되어 그릇 표면을 메우다시피 그림을 그렸으며, 무늬도 저속하고 안일하여 격을 잃고 있다.
청화백자에 그리는 무늬는 시대 또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각양각색의 그림이 그려졌으며 중기 이후부터는 매우 복잡해져 여러 식물, 동물, 산수, 십장생·문자 등을 복합적으로 그려 넣었다. 대체로 초기의 문양이 간결하고 청초한 데 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둔하고 번잡 하였다.
임진왜란과 일본 백자 아리타야끼
17세기 초까지 일본은 도자기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도자기를 갖고 싶었던 일본의 영주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조선의 도공들을 잡아갔다.
임진왜란 당시 끌려간 도공 중에 일본에서 도조(陶祖)로 추앙받았던 이삼평은 아리타(有田)에서 백자의 원료가 되는 흙을 발견하고, 이를 사용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를 빚었다.
당시 일본에 잡혀간 조선 도공들은 영주들의 극진한 지원 아래 마음껏 예술성을 살릴 수 있었다. 이에 반해, 기술을 천시하던 당시 조선에서 천민 대접을 받았던 조선 도공들은 자신 명의로 된 도자기를 빚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을 시켰다.
반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도예능력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기술의 전수가 문서화 되어있지 않았고 소위, 경험에 의한 전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장인들의 공백을 후예들이 이어가지 못하고 우수한 조선의 백자는 안타까운 쇄락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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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써야.... 검색 방문자수가 늘죠? ㅋㅋ
나름 열심히 썼습니다. 행여 레포트를 쓰거나 할때, 많은 분들의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_=
이런 비싼 물건들에 안목이 있으셨군요..
청화백자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 잘 보고 갑니다~
안목은 전혀 없습니다 ^^
예전에 자료들 정리해둔게 있어서 한번 올려봤지요.
이런게 검색을 통한 유입이 많더라고요 ㅋ
영주들끼리 싸우며 아무렇지 않게 백성을 도살할때도 도공은 절대 죽여서는 안되는 존재였다고 하네요. 오히려 패하더라도 데려와야하는 존재, 황금알을 낳는 거위랑 동급이었죠. 도자기가 흔해서 도공을 천시하던 조선과 도자기가 황금처럼 거래되던 (실제로 유럽에선 동양의 도자기를 금과 같은 무게로 거래했다고 합니다) 일본과의 차이가 역사의 아이러니 같네요.
그렇죠.. 임진왜란 자체가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릴만큼 일본은 도자기에 대한 열망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도자기는 언제봐도 멋져여, 가격이 높은게 흠이지만 옛날에도 그랬겠져